[이관형 기자의 변론] 영화 'F20'을 보고난 후의 절망..."이 영화는 당사자보다 가족의 마음을 더 아프게 할 것"
[이관형 기자의 변론] 영화 'F20'을 보고난 후의 절망..."이 영화는 당사자보다 가족의 마음을 더 아프게 할 것"
  • 이관형 기자
  • 승인 2021.10.06 18:1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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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F20' 예고편 포스터는 "고양이 살해자는 조현병 환자" 암시
국민 대다수는 이 영화에 관심 없어...예고편과 포스터로 편견 이미지 구성돼
"당사자 가족은 조현병 감추려 살인하거나 무릎 꿇고 빌어야 하는 존재 아냐"

1938년 10월 30일, 일요일 저녁 7시 경. 미국은 한바탕 소동을 경험합니다. 뉴욕과 샌프란시스코를 비롯한 여러 도시에 공포의 그림자가 드리웁니다. 많은 사람들이 피난을 가기 위해 짐을 싸고, 어떤 사람들은 총을 들고 거리로 뛰쳐나옵니다.

자동차의 피난 행렬이 이어지는 가운데, 경찰서와 방송국에는 수많은 전화가 빗발쳐 정상적인 기능이 마비될 정도였죠. 전쟁이 일어난 것일까요? 아니면, 대형 화재나 쓰나미 같은 재해가 일어난 것일까요?

사실, 이 같은 소동은 한 라디오 방송국으로부터 시작됐습니다. 당시 방송국에서는 '우주 전쟁'이라는 원작 소설을 각색한 <화성인의 침공>이라는 1시간짜리 라디오 드라마를 송출하고 있었습니다. 이 드라마는 가상의 임시 속보 뉴스 형식으로 중간 광고 없이 방송이 됐습니다. 당시 가상의 뉴스를 전하는 앵커 역할은 ‘오손 웰즈’라는 당대 최고의 배우가 맡았습니다. 드라마가 시작되는 시점에 안내 멘트가 나왔습니다.

출처 : 뉴욕포스트
출처 : 뉴욕포스트

“여러분은 지금 허버트 조지 웰스의 ‘우주 전쟁’을 각색한 오손 웰스의 드라마를 듣고 계십니다.”

이처럼, 라디오 방송국은 실제 뉴스 보도가 아닌, 가상의 뉴스 보도 형식으로 드라마를 이어나간다고 사전에 안내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다른 채널의 인기 프로그램과 시간이 겹치다 보니, 늘 방송이 시작된 뒤 한참 후에야 청취자들이 몰려든다는 사실입니다. 대다수의 청취자들은 방송에서 나오는 상황이 실제가 아닌 가상이라는 점을 알 수가 없었죠.

게다가 진짜로 화성인이 침공한 것처럼 여러 가지 효과음과 폭발음까지 들리다보니, 이 드라마는 더욱 현실적이고 생동감있게 청취자들에게 다가왔습니다. 특히 앵커 역할의 ‘오손 웰즈’는 탁월한 연기력과 실감나는 대사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진짜 뉴스처럼 믿을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습니다.

출처 : 중앙선데이
출처 : 중앙선데이

다음날, 뉴욕타임즈를 비롯한 미국의 언론들은 앞 다투어 지난 밤의 소동에 대해 톱 기사로 다루었습니다. 라디오로 인한 소동이 있고 난 후, 3주 동안 1만2500여 건의 관련 기사가 보도될 정도였습니다.

이에 대해 ‘오손 웰즈’는 자신이 출연한 방송으로 인해 사과 기자회견을 열었습니다. 하지만 이 사건으로 오손 웰즈는 하루아침에 유명인사가 됩니다. 이전까지 B급 영화에 출연하며 생계를 유지하던 그는, 이후 여러 유명 작품에 출연하며 배우로서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당시 라디오 청취자가 많지 않았음에도 사회적인 혼란과 소동을 야기한 것은 아이러니한 일입니다. 하지만 오히려 청취자가 많지 않았기에, 픽션이 팩트로 둔갑해서 사람들 사이에 전파되는 것이 가능했습니다(김재한, 2016).

라디오 방송을 들은 소수의 사람들은 화성인의 침공을 실제로 믿었고, 가족이나 친구, 주변 지인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며 빨리 대피해야 한다고 전달했습니다. 처음에는 허황된 이야기라 생각하던 사람들도, 가깝게 지내던 사람이 전하는 이야기를 무작정 무시할 수 없었고, 그 출처가 당시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치던 매체인 라디오 뉴스라서 더욱 의심할 수 없었습니다.

또한 문 밖에서 피난 준비를 하는 행렬을 바라보며 허황된 거짓을 사실로 믿게 되었고요.

출처 : 네이버 영화
출처 : 네이버 영화

지난 9월 28일, 조현병을 다룬 영화 ‘F20’의 새로운 예고편이 등장했습니다. <‘F20’ 뉴스 특보 영상>이라는 제목의 이 영상도 라디오 방송 ‘우주전쟁’처럼 가상의 뉴스 형식으로 제작됐습니다. 

<뉴스 특보! 서울시 모 아파트 의문의 사건 제보... 경위 빨리 밝혀야> 라는 타이틀과 함께 가상의 뉴스 앵커는 다음과 같이 멘트를 합니다.

“지난 10일 오전, 서울의 한 아파트에서 불에 탄 고양이의 사체가 발견됐습니다. 경찰은 사체가 훼손된 점으로 볼 때 단순 사고에 의한 발생 가능성은 낮다고 보고 수사에 나섰지만 폐쇄회로(CC)TV가 고장나 있어 수사의 어려움이 예상됐습니다. 하지만 사건 현장을 목격했다는 입주민의 진술이 추가로 나오면서 수사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습니다.”

이 뉴스 보도 형식의 영상에 이어, 본격적인 영화 예고편 영상이 이어집니다. 그리고 뉴스에 소개된 대로, 불에 탄 고양이 사체와 조현병 가진 청년을 범인으로 의심하는 듯한 주민들의 장면이 나옵니다.

출처 : 네이버 영화
출처 : 네이버 영화

물론, 이 가상의 뉴스 영상을 보고 서울의 한 아파트에서 조현병 환자에 의한 고양이 살해 사건이 실제로 발생했다고 믿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반대로, 이 영상을 보고, “고양이 사체를 발견한 주민들이 조현병 환자를 범인으로 의심하는 모습을 보니, 주민들의 편견이 잘못되었구나. 나는 저런 편견을 갖기보다, 조현병 환자를 우리의 따뜻한 이웃으로 받아들여야겠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절대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예고편을 본 사람들은 실제로 고양이와 같은 동물 살해 뉴스를 보고 나면 무의식중에 조현병 환자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되겠죠.

한 언론 인터뷰에서 영화 제작진은 “아주 조심스럽게 접근해도 자칫 작은 표현 하나가 왜곡돼 보일까 조심 또 조심했다”라고 밝힌바 있습니다(조연경, 2021).

그런데 영화 외에 따로 예고편을 제작해 “고양이를 죽인 사람이 조현병 환자일 수 있다”라는 접근법. 앵커 역할의 배우를 섭외하여 실제처럼 보이게 하는 뉴스 형식의 표현은 “조심 또 조심했다”라는 제작진의 뜻과 적합하지 않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이미 조현병 환자와 가족들은 언론의 무분별한 범죄 보도 행태에 의해 상처를 받을 만큼 받아 왔기 때문이죠. 굳이 뉴스 형식의 예고편까지 만들 필요는 없었습니다.

출처 : 네이버 영화
출처 : 네이버 영화

많은 당사자와 가족들이 영화의 결말에 대해 궁금해했습니다. “과연, 영화 속에서 고양이를 죽인 게 조현병 아들일까? 아닐까?” 하고 말이죠.

고양이를 죽인 게 조현병 아들이라면 이 영화로 인해 조현병에 대한 편견이 심해질 거라 걱정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만약 고양이를 죽인 게 조현병 아들이 아니라면 사람들의 잘못된 편견을 비판하는 내용의 영화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고양이를 누가 죽였느냐가 중요한 문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대다수의 국민들은 이 영화를 보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영화 ‘F20’에 대해 관객 수가 적게는 수십만 명일 수 있고, 아주 잘 되면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이 영화를 끝까지 보게 될 것입니다. 영화를 끝까지 본 사람들에게는 결말이 어떻게 진행되느냐에 따라 편견이 더 심해질 수도, 인식이 개선될 수도 있겠죠.

하지만 대다수의 국민들은 이 영화를 보지 않습니다. 그래서 대다수의 국민들에게 보여지는 것은 영화 예고편과 포스터, 그리고 예고편과 포스터 속 잔상으로 남는 텍스트와 이미지뿐입니다.

특히 포스터에 쓰여진, “사람들한텐 그냥, 미친 게 죄야”라는 문구라든가, “우리 애가 죽이는 거 봤어요?”라는 문구를 보면서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까요? 티비 채널을 돌리다가 중간 광고로 나온 예고편이나, 버스를 기다리다가 마주친 영화 포스터를 보면서 사람들에게 조현병이 어떤 잔상으로 남을까요?

현실적으로 대다수의 국민들은 조현병에 대해 시간과 돈을 투자할 만큼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조현병을 공부하고 제대로 알기 위해 극장에 가거나 서점에서 책을 구매하지 않습니다.

그래서인지 언론은 조현병 관련 범죄를 더 자극적으로 보도합니다. 마찬가지로, 사람들의 시선을 끌려면 예고편과 포스터도 더 자극적인 이미지와 텍스트로 만들어야 하겠죠.

출처 : KBS
출처 : KBS

포스터를 접한 다수의 사람들은 ”조현병은 누굴 죽이는 건가 보다~ 사람들에겐 미친 게 죄일 수도 있겠구나~”하고 더 이상 깊이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제작진이 사회의 편견과 오해를 해소하기 위해 영화를 기획한 것이 진심이라도, 예고편과 포스터에 좀 더 신중하고 당사자와 가족들을 배려하는 고민이 필요했습니다.

기자는 영화 F20과 관련하여, 더 이상 기사를 쓰지 않고 있었습니다.

국민 청원과 시청자 청원을 바라보면서, 혹시라도 이 영화가 진심으로 조현병에 대한 편견과 오해를 풀기 위해 제작됐는데, 제 기사로 인해 억울한 피해를 입을 것이 걱정됐습니다. 

얼마 전 F20의 언론 시사회가 열렸음에도, 다른 대형 언론사와 달리 <마인드포스트>는 초대받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 역시 제가 정보력이 부족해 언론 시사회에 신청하지 못한 걸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제작진에 메일로 인터뷰 요청을 보냈지만 명확한 답을 얻지 못한 것도, 제가 좀 더 적극적이지 못했기 때문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10월 6일 오전, 동네 극장에서 이 영화를 관람했습니다.

영화가 끝나고 밖으로 나와 사무실에 가기 위해 버스를 기다리다 포스터를 마주했습니다. 마음이 복잡했습니다. 그래도 아주 조금의 희망을 가졌는데, 그조차도 무너져 버리는 것 같았습니다. 이 영화는 당사자보다도 가족들의 마음을 더 아프게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문득 어머니가 생각났습니다.

제 어머니도 당사자 가족입니다. 18년 전 기자의 나이 스무 살 때, 어머니와 대학병원에 검사를 받으러 갔었습니다. 조현병 진단을 받고, 첫 정신과 약을 받아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어머니는 아버지와 여동생이 보지 못하도록 구석 깊숙한 곳에 약봉투를 감추셨습니다. 가족에게조차 제 병을 숨길 수밖에 없었죠. 하지만 지금은 온 가족이 제 병을 이해하고, 활동을 지지해줍니다.

어머니도 더 이상 제 병을 부끄러워하지 않고요. 그렇게 되기까지,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하지만 영화는 당사자와 가족들에게 다시 약봉투를 감추어야 한다고 말하는 듯합니다.

이 영화에서 당사자 아들을 둔 어머니가 조현병을 감추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사투를 벌입니다. 반면, 또 다른 당사자의 어머니는 아파트 주민들 앞에서 무릎을 꿇고, 더 이상 이사 갈 곳도 없다며, 한 번만 아들의 잘못을 용서해달라고 눈물 흘리며 비는 장면이 나옵니다.

기자는 영화 제작진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제 어머니를 포함한 당사자 가족들은 조현병을 감추기 위해 살인을 저지르거나, 동네에서 쫓겨나지 않기 위해 무릎을 꿇고 빌어야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고 말이죠.

출처 : KBS
출처 : KBS

“2021년 가장 날카롭고 충격적인 시선“이라는 포스터의 홍보 문구처럼, F20은 당사자와 가족들에게 충분히 날카로운 상처를 주었고, 제작진을 포함한 사회의 시선이 당사자와 가족들에게 얼마나 충격적으로 다가올 수 있는지를 일깨워 주었습니다.

 

참고기사

김재한(2016. 10. 30)“외계인 침공 드라마, 실제 뉴스로 착각한 이유는”. 중앙선데이.

https://www.joongang.co.kr/article/20797374

조연경(2021.09.30.) “차별 편견 맞선 F20 조현병 아들 감춘 장영남 짙은 모성애” JTBC뉴스.

https://news.jtbc.joins.com/html/336/NB1202533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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